워렌 버핏이 자녀에게 주는 충고를 읽어 보았습니다. 가능한 집을 빨리 사라. 오래 사용할 물건은 좋은 것을 사라. 친척이나 친구와는 같이 일하지 말라 기회가 있으면 창업해라. 고독에 익숙해져라. 반드시 책 읽는 습관을 길러라. 감정을 잘 다스리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라. 등등.
대부분이 성공하는 리더가 되려면 갖추어야 할 것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오늘의 행복을 빼앗기지 마라.”
제가 처음 풀타임 사역을 시작하던 날 저는 더없이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목회를 하기 위해 공부하면서 잠시도 쉴 틈없이 일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일만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는 것이 기쁨이었고, 목회자로 설교를 준비하고, 제자훈련을 하며 하루 하루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합병하고, 교회를 건축하며 지나 온 시간들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제게 참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교회 건축후에 만든 영상 가운데 “나는 행복한 목회자”라는 고백을 하는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사람들은 각각 살아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삶이 행복한 삶일까요?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행복한 삶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을 잘 감당해 가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든, 해야 하는 일이든 그 일을 대하는 내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때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해지는 행복이 아닌,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경우 목사
유난히 더워서 한밤중에 잠이 깼습니다. 그런데 캄캄합니다. 침대 머리 곁에 있는 스탠드에서 알려주던 시계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조금 씩이라도 밝혀주었던 전자기기의 불빛도 전혀 없습니다. 셀폰을 들고 시간을 보니 이른 새벽입니다. 무의식 중에 전기 코드가 빠졌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일어나니 집 안에 어둠이 가득합니다. 전기가 나갔습니다. 잠이 덜 깬 저를 인도해 주던 불빛들이 사라지면서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셀폰을 켜들고 조그마한 불빛에 의존하며 후레쉬를 찾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적막한 한 밤중의 고요를 느끼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기도 해 봅니다.
이것도 잠깐 해야 할 일이 생각이 납니다.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서는 거라지를 열어야 하는데 전기가 없으면 열지를 못합니다. 수동으로 해야 하니 씻기 전에 차를 밖으로 내어 놓아야 겠다는 생각에 거라지 도어를 수동으로 하고 열어봅니다. 온 동네가 전기가 나갔기 때문에 밖은 은은히 비치는 달빛에 덮여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차를 내어 놓고 후레쉬를 켜두어 집안을 희미하게 나마 밝혀 놓았습니다.
샤워를 하면서 물은 전기가 없어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게 되면 삶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온 동네가 조용합니다. 빛이 사라졌을 뿐인데 적막함만 가득할 뿐입니다. 냉장고에 있는 식료품들을 걱정하며 동네를 벗어납니다. 그런데 전기가 나간 곳은 우리 동네 뿐이었습니다. 조금 길을 돌아 나오니 길거리는 환하고, 동네마다 불이 환히 켜져 있었습니다. 잠시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 동네만? 누가 보상이라도 해주나?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지요. 조금의 감사하는 마음조차 사라집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다같이 고생한다면 별다른 불평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나에게만 있는 고통과 고난이라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가벼운 내 자신의 감정의 변화에 놀랐던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이 경우 목사
지난 주간에 십자가의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정순학 목사님의 사모님이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받았습니다. 53세. 꽃 다운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100세 시대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나이에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는 것이 참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좋아지시는 듯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매번 부고를 받을 때마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살아온 날보다 죽게 될 날이 가깝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이 바라보는 죽음과 청년들이 바라보는 죽음이라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언젠가 공원묘지에 가서 세워져 있는 비석들을 하나 하나 자세히 보게 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비석은 20대의 창창했던 청년의 비석이고, 어떤 비석은 100세로 장수하신 분의 비석이었습니다. 어떤 비석은 먼저 가신 아내의 비석이었는데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담아 놓은 비석도 보았습니다.
올 때는 순서를 가지고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100세를 사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100세의 삶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반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반의 반만이 주어졌습니다.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가깝게 다가오는 듯 싶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에 충성하다 가게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이 또한 죽음입니다.
암 투병하시던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에게 암을 주신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며 마지막 그날까지 충성하시겠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은 암이 깊게 진행된 것을 발견하고 나서 오히려 죽음을 홀가분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있기에 이렇게 죽음을 담대하게 준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그날이 기대가 됩니다.
이 경우 목사
설거지를 하러 교회 주방의 싱크대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싱크대 안에 작은 생물체 하나가 보입니다. ‘게코’. ‘벽도마뱀’이라고 하는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싱크대 벽에 붙어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물이 닿게 되면 물을 피하는 것을 보며 물에 조금 약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은 생명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보니 너무 귀여워서 계속 관찰하게 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도망가지를 않습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갈 곳을 찾고 있지만, 벽을 타기에 너무 미끄러운 것 같습니다. 사방이 벽입니다. 나아갈 곳이 없습니다.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을까요? 조금씩 흩뿌려지는 물을 피해 사방이 막힌 벽 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니 불쌍해 보입니다.
도마뱀은 해충이나, 작은 곤충들을 잡아 먹고 삽니다. 그래서 오히려 집을 깨끗하게 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조심스럽게 휴지로 들어올려 주방 바닥에 내려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제가 멀어지니 죽 뻗은 네 발로 아장아장 이동합니다. 이제 자유롭게 다니는 모습이 흐믓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사방에 벽이 가로막힌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을 맞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이런 상황에 놓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낙심도 되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도움의 손길이 온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마치 도마뱀에게 내려온 도움의 손길과 같은 생명을 구하는 길, 구원의 손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구원을 외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시겠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방이 막힌 것 같고, 벽에 둘러 있어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열어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우리를 위해 내려오는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든든한 배경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이 경우 목사